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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자 : CTS
작성일시 : 2010-06-08
조회 : 1,362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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올해는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'경술국치'가 있은 지 100년이 되는 햅니다. 암울했던 일제시대 한국교회는 3.1운동을 주도하며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요. 특히 서울의 종로2가는 그 중심지가 돼 3.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. 6월 호국 보훈의 달, 역사적 유적지로서 종로2가의 의미를 정희진 기자가 조명해봤습니다. 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 민족독립과 청년운동을 이끌었던 YMCA기독교청년회. 종로 2가 서울YMCA빌딩에서는 3.1운동의 중심지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. 태화기독교사회복지재단이 위치한 태화빌딩.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, 선언식을 거행해 3.1운동의 불길을 당겼습니다. 당시 민족대표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뒤 종로경찰서로 연행됐으며, 이후 파고다공원에서는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. 태화빌딩 옆 하나로빌딩에는 3.1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그로 인해 수난을 겪었던 중앙감리교회가 있습니다. YMCA 간사로서 감리교 독립운동 연락책임을 맡았던 중앙감리교회 박희도 전도사와 당시 담임전도사였던 김창준을 민족대표로 배출했습니다. INT 김명구 교수 /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상임연구원 천민인권운동의 중심체였던 승동교회. 1919년 2월 20일 학생지도자들은 승동교회 1층 밀실에서 3.1학생독립만세운동을 수기했습니다. 그러나 곧 만세운동이 범국민적으로 이뤄지게 됨에 따라 이미 작성했던 자체 선언서를 소각하고, 28일 3.1독립선언서를 배포하게 됩니다. 당시 차상진 담임목사는 12인 상소를 조선총독에게 제출하고 투옥당했으며, 교회가 심한 수색을 당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. INT 박상훈 목사 / 승동교회 종로2가에서 시작된 3.1운동은 1년 동안 2백만명 정도가 참여하는 범국민적 독립운동으로 확산됐습니다. 당시 기독교 교세는 인구 1700만 명의 2%에도 못 미치는 30여만 명. 하지만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을 배출하고, 교회와 기독교학교마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우리 선조들의 신앙은 한국교회에 값진 유산으로 남아있습니다. CTS 정희진입니다. DVE 6월 특집, 기독교 유산 //민족운동의 성지, ‘종로’ 서울YMCA빌딩 / 서울 종로구 -------- 장소자막 태화빌딩 / 서울 종로구 -------- 장소자막 민족대표, 독립선언 낭독․선언식 거행 하나로빌딩 / 서울 종로구 -------- 장소자막 중앙감리교회, 민족대표 2인 배출 INT 김명구 교수 /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상임연구원 승동교회 / 서울 종로구 -------- 장소자막 학생지도자, 3․1학생독립만세운동 수기 담임목사 투옥되는 등 고난 겪어 INT 박상훈 목사 / 승동교회 3․1운동, 종로2가서 시작돼 전국으로 영상취재 강권수 전상민 |